후원의 애련정과 가을풍경들.....
딸아이를 시험장에 데려다 주고 두어시간 시간이 있어 오랜만에 창덕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08시 30분...이른시간이라 한적할것 같고 늦가을을 느껴보자는데 매표소에 줄을 선 사람들이 보인다.
9시에 개장이라는데 왠줄?
의아한 생각이 들어 가서 물어보니 한 남성 표를 못구할까 걱정스러워한다.
후원(비원)은 1시간에 1회 개장이라는데 50명으로 인원을 제한한단다.
다시말해 줄을서도 단체표 때문에 원하는 회차의 표를 못구할수도 있다는...
창덕궁은 두세번 와본적 있지만 후원은 아직이라 전혀 몰랐다. ㅎㅎ
아뭏든 창덕궁 3000원/후원 5000원 합 8000원을 내고 09시에 입장을 한다.
후원은 10시에 첫개장~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
보물 제383호. 1412년(태종 12)에 창건되었고, 1451년(문종 1)과 1506년(연산군 12)에 개조하여 더 크게 만들라는 왕명이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 처음에는 지금보다 작은 규모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는 별궁이었던 창덕궁이 점차 정궁의 구실을 하게 되면서 정문을 보다 위엄있게 만들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8년(광해군 1) 다시 지었고, 1721년(경종 1) 동쪽 아래·위층 부연을 수리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우진각지붕을 한 누문(樓門)이다. 돌계단이 있는 장대석 기단 위에 세워졌는데 기단은 현재 아스팔트 포장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다른 궁궐의 문이 앞면 3칸인 데 비해 이 문은 2칸이 더 넓으며, 아래층은 12개의 평주와 4개의 고주로, 위층은 12개의 병연주와 2개의 고주로 이루어져 전체적으로 건물이 옆으로 퍼진 느낌을 준다. 다포계로 아래·위층 모두 내3출목·외2출목으로 되어 있고, 아래층은 우물천장, 위층은 연등천장이며, 계단은 좌우측 툇간의 끝에 있다. 지붕마루는 양성을 하였으며, 취두(鷲頭)·용두(龍頭)·잡상(雜像)을 올려놓고 사래의 끝에는 토수(吐首)를 씌웠다. 조선 중기 성문건축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궁궐의 누문이다
돈화문의 기둥사이로 멀리 북한산이 보인다.
창덕궁 회화나무
창덕궁 회화나무는 창덕궁 돈화문을 들어서자마자 관람로 양 옆에 나란히 자라고 있는 회화나무 8그루로 나무높이는 15.0~16.0m, 가슴높이 줄기직경은 90~178㎝에 이르는 노거수이다. 회화나무는 궁궐 입구에 특별한 사유를 가지고 심어 가꾸어 왔는데, 창덕궁 돈화문 주변은 궁궐의 삼조(三朝) 중 조정의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이 배치되는 외조(外朝)의 공간에 해당되는 곳으로 궁궐 입구 주변에는 예로부터 중국 궁궐 건축의 기준이 되는 「주례(周禮)」에 따라 회화나무를 심었다. 「주례(周禮)」에 따르면 외조(外朝)는 왕이 삼공(三公)과 고경대부(孤卿大夫) 및 여러 관료와 귀족들을 만나는 장소로서 이 중 삼공(三公)의 자리에는 회화나무(槐)를 심어 삼공(三公) 좌석의 표지(標識)로 삼았다고 하며, 이 때문에 회화나무는 삼공 위계(位階)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면삼삼괴삼공위언(面三三槐三公位焉)<「주례(周禮)」, 추관(秋官), 조사(朝士)>’) 창덕궁 회화나무는 위와 같은 사유로 궁궐 앞에 심겨진 회화나무 중 남겨진 것으로 추정하며, 1820년대 중반에 제작된 「동궐도(東闕圖)」에도 노거수로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수령은 300~400여년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들 회화나무 8그루는 조선시대 궁궐의 배식 기준과 의미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노거수로 판단된다.
비원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해 보이는데 공식명칭은 후원이란다.
후원이 10시에 개장이니 1시간정도 창덕궁을 보고 후원입장을 하면 되겠는데
1시간반이 걸린다는 후원을 다 볼수는 없을것 같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으로 가려면 이 진선문을 지나야 한다.
사진 왼쪽으로 난 문으로 들어서면 인정전을 만난다.
창덕궁 인정전(昌德宮仁政殿)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이 외국의 사신을 접견하고 신하들로부터 조하를 받는 등, 공식적인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다포계(多包계) 팔작지붕건물. 국보 제225호.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 조선왕조 궁궐의 정전다운 격식과 의장(意匠)이 잘 갖추어져 있다.
인정전은 경복궁의 근정전, 창경궁의 명정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세 정전 중 하나로, 건축적으로는 규모가 근정전보다는 조금 작고 건립연대는 명정전보다 뒤떨어져 중간 위치에 있다고 하겠으나, 조선왕조 역사의 주무대가 되었던 점에서는 다른 정전과는 다른 큰 의미를 가진다.
인정전의 내부모습
사극을 보면 너무나 자주보는 바로 그 왕의자리.
이제 인정전을 뒤로하고 <선정전>으로 가본다.
선정전(宣政殿)
보물 제814호. 앞면 3칸, 옆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이다. 창덕궁을 창건할 때 건립되었으나 인조반정 때 소실되어 1647년에 중건했다. 장대석을 바른층쌓기한 한 단의 월대 위에 넓은 장대석 바른층쌓기 기단을 만들고 다듬은 초석들을 놓은 다음 그위에 12개의 평주와 2개의 고주를 세웠다. 기둥과 창방 위에 평방을 놓고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놓은 다포식 구조이다. 공포의 짜임은 외3출목·내4출목으로 살미의 끝은 날카로운 앙서로 되어 있고 내부는 교두형으로 되어 있지만, 삼제공과 사제공 끝은 운형으로 초각되어 있다. 가구(架構)는 전면에 세운 2개의 고주와 뒤쪽 평주에 대들보를 걸고, 대들보 위는 우물천장으로 가렸다. 바닥에는 현재 카펫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본래 전바닥이었던 것을 일제가 변형시킨 것이다. 어칸 뒤쪽으로 가는 2개의 기둥을 세워 벽체를 만든 다음 어좌와 일월오악병풍을 두었으며, 그 위쪽은 보개천장으로 꾸몄다. 축부의 중앙 어칸에는 띠살문짝을 달았고, 나머지 칸에는 높은 머름을 두고 그 위쪽으로 띠살창호를 달았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양성을 하지 않은 채 치미와 용두를 얹어놓았다.
선정전(편전)의 내부
대조전...창덕궁의 정침(正寢).
보물 제816호. 140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때 중건했다. 인조반정 때 다시 소실된 것을 1647년에 다시 지었고, 1833년에 또다시 화재로 소실된 것을 복원했다. 1917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자 일본인들은 경복궁의 수천 칸 전각들을 헐어낸 재목으로 대조전과 그 일곽을 복원했다.
이제 낙선재를 보고 후원입구로 가면 될듯하다.
낙선재(樂善齋)
낙선재(樂善齋)와 석복헌(錫福軒)ㆍ수강재(壽康齋) 등으로 구성된 낙선재 일대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24대왕 헌종(1827~1849, 재위:1834~1848)대에 조선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고 개혁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만들었는데, 후궁인 경빈 김씨와 대왕대비 순원왕후와도 관련이 깊은 공간이었다. 근현대에 들어와서는 마지막 황비 순정효황후,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고종 황제의 외동딸 덕혜옹주 등 황실의 마지막 여인들이 여생을 보낸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낙선재는 헌종이 한창 왕권강화를 시도하던 시기인 1847년(헌종 13)에 건립되었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에는 창경궁 영역에 속해 있었는데, 지금은 창덕궁에서 관리를 맡고 있어 창덕궁으로 입장해야 볼 수 있다. 낙선재란 이름은 중국의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순(舜) 임금의 고사에서 유래했으며, ‘선(善)을 즐거워한다’는 뜻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헌종이 화려함을 쫓지 않고 소박함을 내세우고자 한 의도에서 이곳의 단청을 칠하지 않았음 파악할 수 있다.
헌종은 정조를 이어받고자 하는 의지를 담아 낙선재를 세웠다. 이것은 낙선재의 입지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정조는 즉위 직후 개혁의 공간으로 규장각을 건립하였는데, 이때, 규장각의 2층은 수많은 책과 선왕의 어진을 보관하는 주합루(宙合樓)였다. 정조는 1782년(정조 6) 세자의 공간으로 중희당을 건립하며, 바로 연접하는 곳에 주합루를 모방한 소주합루(小宙合樓: 헌종대 승화루로 개칭)를 세워주었다. 헌종은 낙선재를 바로 이 소주합루에 기대어 그 옆쪽에 건립하였다.
헌종은 낙선재를 건립하여 선조(先祖)의 뜻을 이어받고자 했고, 실제로 낙선재 영역인 승화루에 많은 서책을 보관했다. [승화루서목(承華樓書目)]을 보면, 책이 총 3,742책이며 서화가 총 665점에 이른다. 이처럼 헌종은 승화루 옆에 낙선재를 건립하고 훙서하기 전까지 낙선재를 주요 활동 공간으로 이용함으로써, 규장각을 건립한 정조를 본받아 정치 개혁의 의지를 보이고자 했다.
석복헌(錫福軒)
낙선재 건립 이듬해인 1848년(헌종 14) 8월 11일, 헌종은 낙선재 동쪽에 석복헌을 지었다. 석복헌은 ‘복(福)을 내리는 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복(福)은 왕세자를 얻는 것이라 추측된다. 헌종은 후궁인 경빈 김씨를 지었다. 헌종은 왕비 효현왕후가 승하한 뒤, 1844년(헌종 10) 9월에 효정왕후를 계비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3년 동안 후사가 없자, 1847년(헌종 13)에 새로 후궁 경빈 김씨를 맞이하였고, 이듬해에 그녀가 거처할 석복헌을 지어준 것이다. 정조를 닮고 싶어 했던 헌종은, 후궁을 들이는데 있어서도 그 전례를 따랐다. 정조가 정미년인 1787년(정조 11)에 후궁 수빈 박씨를 들인 것처럼, 헌종은 그로부터 꼭 60년만인 1847년 (헌종 13) 정미년에 경빈 김씨를 선발했다. 그리고 정조가 수빈 박씨를 맞아들인 예에 따라 헌종은 경빈 김씨와 가례를 거행하였다. 이는 장차 후궁을 통해 태어날 원자의 권위와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헌종은 석복헌을 새로 지으면서, 그 옆의 수강재도 함께 중수(重修)하였다. 수강재 중수 상량문에는 수강재를 고쳐지은 이유를 육순을 맞이한 대왕대비의 처소로 사용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서경(書經)]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복(福) 중에 장수와 강녕을 기원하는 이곳 수강재에는,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머물렀다. 수강재 중수에서 주목되는 점은, 정비가 아닌 후궁 경빈 김씨의 건물과 순원왕후의 건물이 나란히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경빈 김씨의 위상을 높이고 그 후사의 권위와 정통성을 높이려 했던 헌종의 의지를 담은 것이다. 정조는 창경궁에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자경전(慈慶殿)을 짓고 자신은 근처인 영춘헌(迎春軒)에 기거했으며, 결국 서쪽 집복헌(集福軒)에서 수빈 박씨가 순조를 낳았다.. 헌종은 바로 이 상황을 이어받기 위해 석복헌과 수강재를 마련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제 낙선재를 떠나 후원입구로 간다.
후원 입장표가 매진이라는 안내가 계속나오고 있다.
창덕궁 옆의 창경궁은 별도로 입장료 1000원을 내야한다.
현재시각이 9시50분이 넘어 구경할 시간은 안되 사진 한컷만 양해를 구하고 찍고 나온다.
창경궁
사적 제123호. 이 궁궐에서 장조(莊祖)·정조(正祖)·순조(純祖)·헌종(憲宗) 등 여러 왕들이 태어났다. 조선시대 5대 궁궐 가운데 다른 궁궐은 모두 남향하고 있으나 이 궁궐만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동향하여 있다. 본래 태종이 아들 세종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면서 자신이 거처할 궁궐로 지은 수강궁(壽康宮)에서 시작되었다. 그후 1484년(성종 15) 이 수강궁 자리에 새로이 별궁인 창경궁을 건립했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16년(광해군 8) 다시 세웠다. 이때 동향으로 세워졌던 명정전(明政殿)을 남향으로 고쳐야 한다는 김일손의 상소가 있었으나 도감(都監)에서는 만약 남향으로 할 경우에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종묘의 내청룡으로 이어지는 맥이 함춘원(含春苑)의 남쪽 지맥을 끊게 된다면서 그대로 둘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소실된 많은 전각들이 1633년에 중건되었다. 1656년(효종 7)에 요화당(瑤華堂)·난향각(蘭香閣)·취요헌(翠耀軒)·계월각(桂月閣) 등 4개의 전각을 지어 효종의 네 공주들을 머물게 했다. 1909년에는 일제가 강제로 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든 다음 일반인들에게 관람시켰으며, 1911년에는 박물관을 짓고 이름을창경원(昌慶苑)으로 격을 낮추어 불렀다. 1984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던 문정전(文政殿)과 월랑(月廊) 등을 복원하고 정비하면서 다시 이름을 창경궁이라고 했다.
동향한 궁궐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을 들어서면 금천(禁川)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이 개천 위에는 금천교(禁川橋)인 옥천교(玉川橋)가 있다. 옥천교를 건너면 정전의 정문인 명정문(明政門)에 이르고, 이 문을 들어서면 높은 월대(月臺) 위에 서 있는 정전인 명정전과 마주하게 된다. 동서로 길게 뻗은 월랑은 홍화문과 명정문의 남북 양쪽에서 뻗어나온 월랑과 합쳐져 'ㅂ'자 모양을 이루면서 정전의 좌우 앞쪽을 둘러싸고 있다. 명정전의 남서쪽에는 편전인 문정전과 그 월랑이, 북서쪽에는 많은 내전과 행각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나머지 수천 간의 전각과 행각 등은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이 궁궐의 전체적인 배치는 창덕궁처럼 지형의 높고 낮음을 그대로 두고 꼭 필요한 곳만을 골라 집터를 잡고 정원을 꾸민 것이 특징이다. 〈동궐도 東闕圖〉(국보 제249호, 고려대학교 박물관)를 통하여 1830년대의 창경궁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후원의 문은 10시에 첫 개방을 한다.
가이드의 안내를 듣고...입장한다.
1시간반 관람...개인행동 불가...음식물 섭취관련..
사진으로만 본적이 있는 후원은 어떤 모습일까.
조선시대로 돌아가 내가 주인공이 된듯 한번 걸어보자.
아직도 고운 단풍이 많고 사진을 찍으려는 진사들도 함께한다.
후원에서 첫번째 만나는곳은 "부용지"
‘부용(芙蓉)’은 ‘연꽃’을 뜻한다. 창덕궁 후원의 대표적인 방지(方池)인 부용지는 동서 길이가 34.5m, 남북 길이가 29.4m에 이르는 네모 반듯한 연못으로, 연못 중앙에 소나무를 심은 작은 섬이 하나 떠 있다. 네모난 연못과 둥근 섬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연못은 장대석으로 쌓아올렸고, 남쪽 모서리에는 물고기 조각이 하나 있다. 잉어 한 마리가 물 위로 튀어오르는 모습을 새겼는데, 이것은 왕과 신하의 관계를 물과 물고기에 빗댄 것이다.
연못 남쪽에 위에서 봤을 때 열 십(十)자 모양을 이루는 정자가 있는데, 초석 2개가 연못에 들어가 있다. 이 정자는 원래 숙종 33년(1707)에 ‘택수재(澤水齋)’를 지었다가 정조 16년(1792)에 부용지를 고치면서 ‘부용정(芙蓉亭)’이라 불렀다.
주합루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 지역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누각으로 이익공의 팔작지붕 형태의 건축 양식이다. 누각 앞에는 부용지가 있고, 정면 맞은편에 부용정이 있다. 1층은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규장각(奎章閣)이고 2층은 열람실이었는데, 이 열람실을 주합루(宙合樓)라고 한다. 요즘에는 이 건물 전체를 주합루라고 부르기도 한다.
주합루로 오르기 위해서는 왕과 신하를 물과 물고기로 비유한 어수문(魚水門)을 지나야 한다. 왕은 어수문으로, 신하는 어수문 옆의 작은 문으로 출입했다. 주합루가 자리 잡은 곳은 작은 동산의 경사를 잘 이용한 인공적인 조경이지만, 자연과 조화롭게 꾸며져 있다. 건물 기둥은 둥근 것과 모난 것을 조화롭게 배열하여 하늘과 땅의 이치를 상징한다. 주합루에서 바라보는 부용지는 창덕궁 후원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부용지는 약간 살얼음이 얼어있다.
잠시 자유시간이 주어져 매점에서 따뜻한 커피를 사서 마시며 둘러본다.
어수문을 통해 바라본 주합루.
출입금지로 들어가 볼수는 없다.
이제 애련지로 이동한다.
후원의 가을풍경
잠시 담장너머로 눈길을 돌려보니 창경궁의 단풍이...
창경궁의 식물원인듯.
"애련정"의 멋진 풍경
소원을 빌며 통과하라고...ㅎㅎ
당연히 딸래미 합격기원~
애련지의 고목이 힘들게 생명을 유지해가는 모습
이제 "존덕정" 일원으로 간다.
후원은 역시 왕의 비밀정원 답게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연못과 어우러진 빨갛고 노란 단풍들이 환상적이다.
존덕정
존덕정안의 정조의 교시
10:38분.
이제 옥류천으로 간다고 하는데...너무 느린행보라 좀 답답하다.
11시까지는 나가봐야하니 다 볼수는 없고 옥류천에서 양해를 구하고 혼자 나가야 할 것 같다.
옥류천 세글자는 인조의 친필이라는 설명
옥류천을 구경하다 딸아이를 데리러 간다.
후원은 다음에 기회를 봐서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창덕궁 1시간...후원 1시간반...창경궁까지 3시간정도면 될듯하다.
※ 설명자료는 인터넷에서 조사하여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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